서론: 건강보험이 있어도 가계가 무너지는 이유
한국의 건강보험 보장률은 65% 안팎에 머물러 있다. 나머지 35%, 즉 급여 본인부담금과 비급여 진료비는 고스란히 환자와 가족의 몫이다. 평소에는 감당할 만한 수준이지만, 암·중증외상·희귀질환처럼 치료가 길고 비급여 비중이 큰 질환을 만나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수천만 원의 병원비 앞에서 중산층 가구도 순식간에 빈곤층으로 미끄러진다. 이른바 ‘의료 빈곤화(medical impoverishment)’다.
이 지점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재난적의료비 지원제도다. 2018년 「재난적의료비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과 함께 본사업으로 전환된 이 제도는, 건강보험의 본인부담상한제가 닿지 못하는 비급여 영역까지 국가가 사후에 보전해 주는 마지막 의료 안전망이다. 2026년 5월 보건복지부가 「재난적의료비 지원을 위한 기준 등에 관한 고시」(고시 제2026-110호)를 개정하며 소득·재산 기준을 손질하면서, 이 제도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안전망은 실제로 촘촘해지고 있을까.
본론
1. 제도의 설계 원리 — 본인부담상한제가 놓치는 것을 잡는다
재난적의료비 지원제도를 이해하려면 먼저 본인부담상한제와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두 제도는 이름만 비슷할 뿐 작동 원리가 전혀 다르다.
본인부담상한제는 급여 항목의 연간 본인부담금이 소득분위별 상한액을 넘으면 초과분을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돌려주는 제도다. 소득 1분위는 연 90만 원 안팎, 최고 분위는 800만 원대에서 상한이 걸린다. 문제는 이 계산에서 비급여가 통째로 빠진다는 점이다. 상급병실료, 로봇수술, 신의료기술, 급여 미적용 고가 항암제 등은 아무리 많이 써도 상한제 계산에 잡히지 않는다. 실제로 가계 파산을 유발하는 비용이 정작 안전망 바깥에 있는 셈이다.
재난적의료비는 이 공백을 겨냥한다. 급여 본인부담금과 비급여를 합산한 실제 지출액을 기준으로 삼고, 그 부담이 가구 연소득 대비 일정 비율을 넘으면 지원한다. 판단 기준이 ‘얼마를 썼는가’가 아니라 ‘그 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는가’라는 상대적 기준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같은 1,000만 원이라도 연소득 2,000만 원 가구와 1억 원 가구에게 갖는 무게는 다르다는 상식을 제도에 반영한 것이다.
절차상으로도 두 제도는 순차적으로 맞물린다. 먼저 본인부담상한제로 급여 부분을 환급받고, 그러고도 남은 본인부담액에 대해 재난적의료비를 신청하는 구조다. 중복 지원이 아니라 계단식 보완이다.
2. 2026년 기준 — 누가, 얼마나 받을 수 있나
지원 대상이 되려면 네 가지 관문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첫째, 소득 기준. 기준중위소득 100% 이하 가구가 기본 대상이다. 다만 그 이상이라도 기준중위소득 200% 이하라면 개별심사를 통해 지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2026년 기준중위소득이 인상되면서 같은 절대소득이라도 대상에 포함될 여지가 이전보다 넓어졌다.
둘째, 재산 기준. 재산 과세표준액 5억 4천만 원(시가 약 11억 원) 이하여야 한다. 소득이 낮아도 고액 자산을 보유했다면 제외하는 장치다.
셋째, 의료비 부담 수준. 소득 구간별로 문턱이 다르다.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은 본인부담 의료비가 80만 원을 넘으면, 기준중위소득 50% 이하는 연소득의 10%, 50~100%는 15%, 100~200%는 20%를 초과하면 요건을 충족한다. 소득이 낮을수록 낮은 문턱에서 안전망이 작동하도록 설계돼 있다.
넷째, 지원 수준과 한도. 본인부담 의료비의 50~80%를 소득 구간에 따라 차등 지원한다. 수급자·차상위는 80%, 기준중위소득 50% 이하는 70%, 50~100%는 60%, 100~200% 개별심사 대상은 50% 수준이다. 연간 지원 한도는 최대 5,000만 원으로, 2023년 3,000만 원에서 대폭 상향된 뒤 유지되고 있다.
제도의 폭도 크게 넓어졌다. 초기에는 암·심장·뇌혈관·희귀질환·중증화상·중증난치질환 등 이른바 6대 중증질환 입원에 한정됐지만, 2023년부터 모든 질환의 입원과 중증질환의 외래 진료까지 포함하도록 확대됐다. 특정 병명에 해당하는지가 아니라 실제 부담이 재난적인지를 보는 방향으로 제도 철학이 이동한 것이다.
3. 남은 쟁점 — 사후 지원의 한계와 낮은 도달률
제도가 확대됐음에도 현장에서는 세 가지 문제가 반복적으로 지적된다.
첫째, 사후 정산 구조의 한계다. 원칙적으로 퇴원일로부터 180일 이내에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에 신청해야 하는, ‘먼저 내고 나중에 돌려받는’ 방식이다. 애초에 병원비를 낼 돈이 없어 치료 자체를 포기하는 가구에게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를 보완하려고 입원 중에도 신청할 수 있는 사전 지원 절차가 운영되지만, 요건과 절차가 까다로워 이용률이 높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
둘째, 낮은 인지도다.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환자가 여전히 많다. 병원 사회사업실이 없는 중소 의료기관에서 치료받는 경우, 180일이라는 신청 기한을 모른 채 흘려보내기 쉽다. 최근 복지부가 추진 중인 AI 기반 위기가구 선제 발굴과 의료기관 연계 안내 강화가 이 공백을 얼마나 메울지가 관건이다.
셋째, 비급여 통제 없는 보전의 딜레마다. 비급여 진료비는 의료기관이 자율적으로 정한다. 국가가 비급여 지출을 사후에 보전해 주는 구조가 고착되면, 비급여 가격을 억제할 유인이 오히려 약해질 수 있다. 재난적의료비 확대가 비급여 관리·급여화 정책과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결론: 안전망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도달률
2026년의 재난적의료비 지원제도는 출범 당시와 비교하면 확실히 넓고 깊어졌다. 6대 질환에서 전체 질환으로, 3,000만 원에서 5,000만 원으로, 기준중위소득 100%에서 개별심사 200%까지. 숫자만 놓고 보면 제도는 제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그러나 안전망의 진짜 성능은 그물코의 크기가 아니라 필요한 사람에게 실제로 닿았는가로 측정된다. 신청주의에 기반한 사후 정산 제도는 정보와 여력을 가진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동하기 쉽다. 정작 가장 절박한 가구가 서류와 기한 앞에서 탈락한다면, 한도 상향은 통계상의 개선에 그친다.
앞으로의 과제는 분명하다. 첫째, 사전 지원 절차를 실질적으로 이용 가능하게 다듬을 것. 둘째, 의료기관·건보공단·지자체 복지 시스템을 연결해 신청 이전 단계에서 대상자를 찾아낼 것. 셋째, 비급여 관리와 급여 확대를 병행해 애초에 재난적 지출이 발생할 확률 자체를 낮출 것. 사후에 메우는 안전망보다 좋은 것은, 떨어질 일이 적은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