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복지정책

26년 만의 빗장 풀기 — 의료급여 부양비 폐지가 남긴 것과 남은 것

작성자 엘리아 · 2026년 08월 30일

서론: 연락 끊긴 자녀가 병원비를 막아섰던 26년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소득도 재산도 없지만 서류상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의료급여 수급자가 되지 못한 이들이다. 1999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과 함께 자리 잡은 ‘부양비’ 제도가 그 문턱이었다. 부양의무자의 부양능력이 ‘미약’하다고 판정되면, 실제로 돈을 보내주는지와 무관하게 그 소득의 일정 비율(10~30%)을 수급 신청자의 소득으로 간주해 계산하는 방식이었다. 현장에서 ‘간주 부양비’라 불린 이 제도는 가족 해체와 단절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현실과 가장 동떨어진 규정으로 지목돼 왔다.

정부는 2025년 12월 제3차 중앙의료급여심의위원회에서 2026년 1월부터 의료급여 부양비를 전면 폐지하기로 확정했다. 26년 만의 변화다. 생계급여에서는 2015년 이미 폐지됐던 부양비가 의료급여에서만 남아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남은 마지막 부양의무자 장벽’을 걷어내는 첫 단추에 해당한다. 시행 8개월이 지난 지금, 이 변화가 실제로 무엇을 바꿨고 무엇이 여전히 과제로 남았는지 짚어볼 때다.

본론

1. 부양비 폐지의 구조 —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나

기존 의료급여 자격 판정은 3단계를 거쳤다. 신청자 본인의 소득·재산을 보고, 부양의무자(1촌 직계혈족과 그 배우자)의 존재를 확인한 뒤, 부양의무자의 부양능력을 ‘있음·미약·없음’으로 나눠 판정했다. 문제는 ‘미약’ 구간이었다. 이 구간에 속한 부양의무자의 소득 중 일부를 신청자가 실제로 지원받는 것으로 ‘간주’해 신청자의 소득인정액에 더했기 때문이다. 딸이 보내주지 않는 생활비가 어머니의 소득으로 잡혀 의료급여 탈락 사유가 되는 일이 반복됐다.

2026년 1월부터 이 계산식 자체가 사라졌다. 부양의무자가 있어도 그 소득이 신청자의 소득으로 전가되지 않는다. 부양의무자 기준 자체가 완전히 폐지된 것은 아니지만, 판정 방식은 ‘부양능력 있음’에 해당하는 고소득·고재산 부양의무자에게만 기준을 적용하는 방향으로 단순화됐다. 정부는 이후에도 복잡한 부양의무자 기준을 단계적으로 간소화해 신청 단계의 서류 부담을 줄이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오랫동안 지적돼 온 ‘비수급 빈곤층’ — 실질적으로 빈곤하지만 제도 밖에 있는 계층 — 의 규모를 줄이는 직접적 효과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2. 예산이 말해주는 정책의 무게 — 9조 8,400억 원

제도 변화의 진정성은 예산에서 드러난다. 2026년 의료급여 예산은 국비 기준 약 9조 8,400억 원으로 편성됐다. 2025년 8조 6,882억 원 대비 1조 1,518억 원, 13.3% 증가한 규모다. 단일 연도 증가폭으로는 역대 최대 수준이다. 이 증액분에는 부양비 폐지로 새로 편입될 수급자에 대한 급여비, 고령화에 따른 자연 증가분, 그리고 그동안 지자체 부담으로 이월돼 왔던 미지급금 해소분이 함께 담겨 있다.

의료급여는 그간 만성적인 예산 과소 편성과 지자체 전가라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연말이면 재원이 소진돼 의료기관에 급여비 지급이 지연되고, 이것이 다시 수급자 진료 기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있었다. 13%대 증액은 이 악순환을 끊겠다는 신호로 읽힌다. 다만 예산 증가가 곧 보장성 확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증액분의 상당 부분이 기존 부채 해소와 자연 증가에 흡수된다면, 실제 수급자가 체감하는 변화는 제한적일 수 있다.

3. 함께 추진됐던 ‘정률제’는 왜 멈춰 섰나

부양비 폐지가 문턱을 낮추는 정책이라면, 같은 시기 추진됐던 본인부담 정률제는 정반대 방향의 정책이었다. 현행 의료급여 1종 수급자는 외래 진료 시 의원 1,000원, 병원·종합병원 1,500원, 상급종합병원 2,000원의 정액을 부담한다. 정부는 이를 진료비의 4~8%를 부담하는 정률제로 전환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과다 의료이용을 억제하고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 개편안은 시민사회와 의료계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정액 1,000원이 정률 8%로 바뀌면 고가 검사·처치가 필요한 중증 수급자일수록 부담이 급격히 커지고, 이는 필요한 치료를 포기하게 만드는 ‘의료 접근성 후퇴’라는 비판이었다. 결국 정률제 개편안은 재검토 전까지 보류됐다. 다만 ‘연간 외래 365회 초과’ 이용자에 대해서는 초과 시점부터 본인부담률 30%를 적용하는 조치가 별도로 시행됐다. 이 조치의 적용 대상은 156만 명 수급자 중 약 550여 명(2024년 기준 상위 0.03%)으로 추산되며, 산정특례 등록자, 중증장애인, 아동, 임산부는 적용에서 제외된다. 극단적 과다 이용만 표적으로 삼는 최소 개입 방식을 택한 셈이다.

결론: 문턱은 낮췄지만, 통로는 아직 좁다

2026년 의료급여 개편은 한국 공공부조의 오랜 숙제 하나를 해결했다. 실재하지 않는 가족의 지원을 소득으로 계산하던 비현실적 규정이 사라졌고, 예산도 역대 최대 폭으로 늘었다. 정률제 보류 결정 역시 취약계층의 의료 접근성을 재정 논리보다 앞세운 판단으로 평가할 만하다.

남은 과제는 세 가지다. 첫째, 부양의무자 기준 자체의 완전 폐지 여부다. ‘고소득·고재산 부양의무자에게만 적용’이라는 절충안은 여전히 판정 기준선 바로 위에 있는 가구를 배제한다. 둘째, 늘어난 예산이 실제 보장성 강화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검증이다. 부채 해소에 대부분이 소진된다면 수급자의 체감 변화는 미미할 것이다. 셋째, 보류된 정률제의 향방이다. 재정 지속가능성 논의는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본인부담 조정은 언제든 재점화될 수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얼마나 걷을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어떤 치료를 포기하게 되는가’를 먼저 묻는 설계다. 문턱을 낮춘 다음 단계는, 그 문을 지나온 사람이 실제로 치료받을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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